취미로 책 읽기
이어령 창조학교: 생각

(이어령, 생각의 나무, 2009)

어쩌면 2009년 출판업계에 '사랑'이란 진부한 주제보다 더 진부해진 주제가 '창의력'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코 이 책을 집어든 건 '이어령'이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뭐, 이어령씨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이 책을 집어들었듯이 선뜻 집어들지는 못 하겠다.
그의 책들을 먼저 읽었던 독자라면 많은 부분에서 Deja vu를 보는 듯 할 것이다.
봤던 내용들을 다시 읽고 있으니 전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유창한 스토리 텔링 or 꿈보다 해몽?>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그의 입담은 여전하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으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유창함이 오히려 내겐 불만이었다. 음식으로 빗대면 맛있지만 계속 먹기는 부담스러운 크림스파게티 정도랄까. 감정 몰입은 쉽지만 보고 나서는 뭔가 찝찝한 신파 영화 같기도 하고. 예로 들면 이런 식이다
(..) 그러나 발과 다리의 향연인 월드컵 대회는 '아름다운 발', '섬세하고 예민한 발'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어머니인 대지를 딛고 선 성적 상징으로서 남자의 발이 얼마나 에로틱한가도 재발견됐다.

내가 축구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 지 모르겠으나, '오바'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솔직히 발보다는 홍명보 감독의 휘날리던 엘라스틴 머릿결이 더 생각나는데. 발보다는 머릿결이 더 에로틱하지 않은가?)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일파만파 생각을 넓힐 수 있는 그의 견문에는 감탄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 앞서가는 문체가 아쉬웠다.


<관계론으로보는 이순신과 거북선>
한 때 '불멸의 이순신' 104부작을 몰아보고는 원작 소설 '칼의 노래'(김훈)과 '불멸의 이순신'(김탁환)까지 빠져 읽어댔던 터라,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었다.
불멸의 이순신 전투신

화격포를 이용한 해상 전투를 이끈 이순신의 함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우리는 이순신 장군하면 너무나 자연스레 귀선(거북선)을 떠올린다. 물론 귀선이 이순신 함대에 필수적인 요소이긴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거북선 활용, 학익진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이순신 장군은 전투의 양상부터 철저히 바꾼 인물이다. 왜군은 이제껏 그들의 모태인 해적의 방법 그대로 수군을 움직였다. 그들은 배를 바다 위의 땅으로서 이용했다. 상대의 배로 넘어가 배 위의 육상전투를 벌였다. 군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조선 수군으로서는 대응할 수 없는 방식이다. 지는 전투는 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새로운 틀을 짰다. 배를 대지 않고 포격을 통한 진짜 해상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런 전술에서 학익진도 나온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하드웨어(귀선) 개혁' 에 가려 보지 못하던 이순신 장군의 '소프트웨어(전술) 개혁'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버니큘러 디자인, 한복과 달걀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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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영중인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보면 명성황후 역의 수애가 대략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한복은 넉넉해서 좋습니다. 나는 감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복은 여유롭게 입고 있는 사람을 감싼다. 살이 갑자기 쪘거나 빠졌다해도 조금 더 풀거나 감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는 옷이다.

그리고 그런 한복이 물건을 담는 용도로 바뀌면 보자기가 된다. 가방과 다르게 보자기는 물건을 싸야만 입체적인 형상이 생긴다. 물건의 용량에 따라 보자기의 용량도 달라진다. 더구나 한국의 보자기는 중국, 일본과 달리 모퉁이에 끈이 있는 녀석까지 있어 그 적용범위가 더욱 커진다.

한 걸음 더 가서 달걀꾸러미를 보자. 우선 짚으로 싸서 완충작용을 했다. 좋다, 기본적인 안전포장이다.
그런데, 어? 달걀 윗 부분은 드러나 있다. 완충기능만 따진다면 부족한 디자인이다.
그렇지만 그 드러난 부분이 'fragile'이라고 소리쳐대는 빨간 딱지에 비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지 않는가? 쉽게 무뎌지는 빨간 스티커의 경고보다 달걀이 가려지지 않은 모습은 더 지속적인 경고 효과를 가져다 준다. 이런 달걀 꾸러미는 완충제라는 하드웨어적 기능 뿐 아니라 내용물의 연약함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소프트웨어적 기능까지 두루 갖춘 디자인이다.



이미 그의 다른 저서에서 본 듯한 내용을 별로 와닿지 않는 예(축구, 김치....)를 들어 설명해서 감탄보다는 불만이 많았던 책이다. (물론 그에 대한 기대치가 이미 높기 때문에 감탄이 적었긴 했다)
그렇지만 그의 앞선 저서들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배신이라면 배신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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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쓰면 배가 아픈 속 좁은 글쟁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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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23:22 2009/10/3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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