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박웅현, 알마, 2009)

"우현아, 너는 어떤 사람이 이상형이야?"
한 번은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물어보셨던 적이 있다. 학원을 다니던 때니 최소 10년 전, 열살 위아래 한 두살 쯤 되었을 때일거다. 나름 진지한 고민 끝에 말했다.
"교양 많은 남자요"

물론, 피아노 선생님은 한참을 깔깔 웃으셨다. ("왜지? 난 진지한데? "라고 나는 생각했었고)
선생님이 이어 물으셨다. "교양 많은 게 어떤 건데?"
"..음..."으로 시작해서 뭔가 군더더기 많은 답을 했던 것 같다. ~도 많이 하고, ~도 잘 하고....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많이 읽고, 클래식 음악도 즐겨듣고, 그림도 볼 줄 알고...뭐, 그런 식이었던 듯.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과 'virtue'에 대해 배운 지금까지도'교양 있는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내 자신이 책을 많이 읽으려하고, 클래식 음악도 꽤 듣고, 모던 아트 수업을 통해 그림 보는 법들도 배워가고 있지만, 내 자신이 그리던 '교양 많은 사람'의 범위에 드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이 책으로 만난 이 사람 박웅현, 그리고 인터뷰어 강창래. 이 두 남자, 책장을 넘길 수록 '아, 교양이 넘치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꼈다. 그래, 이런 사람이야 말로 교양있는 남자구나..라는 존경심과 함께 비밀스러운 질투가 든다. '나도 저 이상 인문학적 소양을 쌓겠다'. (대체 이 도 끝도 없는 경쟁심리는 뭐란 말인가. 상대가 되지도 않는 상대로.....)

사람을 향합니다


교양 넘치는 두 남자


Creative Director가 들려주는 창의력 이야기 : 안테나를 높이고 살아라



글을 마치기 전에, 링크 몇 개를 덧붙인다.

http://blog.ohmynews.com/gkfnzl/161794
그가 책을 낸 후 알라딘에서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 동영상을 통해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방송을 타지 못한, 그의 favorite도 확인 할 수 있는 덤.
(몇 분 몇 초에 나온다 친절히 쓰려다 지운다. 찬찬히 '잘' 보시라고)

http://blog.naver.com/whlovese/140091899508
그 밖의 광고도 확인할 수 있는 블로그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31 17:54 2009/10/31 17:54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63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어령 창조학교: 생각

(이어령, 생각의 나무, 2009)

어쩌면 2009년 출판업계에 '사랑'이란 진부한 주제보다 더 진부해진 주제가 '창의력'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코 이 책을 집어든 건 '이어령'이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뭐, 이어령씨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이 책을 집어들었듯이 선뜻 집어들지는 못 하겠다.
그의 책들을 먼저 읽었던 독자라면 많은 부분에서 Deja vu를 보는 듯 할 것이다.
봤던 내용들을 다시 읽고 있으니 전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유창한 스토리 텔링 or 꿈보다 해몽?>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그의 별명대로, 그의 입담은 여전하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으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유창함이 오히려 내겐 불만이었다. 음식으로 빗대면 맛있지만 계속 먹기는 부담스러운 크림스파게티 정도랄까. 감정 몰입은 쉽지만 보고 나서는 뭔가 찝찝한 신파 영화 같기도 하고. 예로 들면 이런 식이다
(..) 그러나 발과 다리의 향연인 월드컵 대회는 '아름다운 발', '섬세하고 예민한 발'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어머니인 대지를 딛고 선 성적 상징으로서 남자의 발이 얼마나 에로틱한가도 재발견됐다.

내가 축구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 지 모르겠으나, '오바'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솔직히 발보다는 홍명보 감독의 휘날리던 엘라스틴 머릿결이 더 생각나는데. 발보다는 머릿결이 더 에로틱하지 않은가?)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일파만파 생각을 넓힐 수 있는 그의 견문에는 감탄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너무 앞서가는 문체가 아쉬웠다.


<관계론으로보는 이순신과 거북선>
한 때 '불멸의 이순신' 104부작을 몰아보고는 원작 소설 '칼의 노래'(김훈)과 '불멸의 이순신'(김탁환)까지 빠져 읽어댔던 터라,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었다.
불멸의 이순신 전투신

화격포를 이용한 해상 전투를 이끈 이순신의 함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우리는 이순신 장군하면 너무나 자연스레 귀선(거북선)을 떠올린다. 물론 귀선이 이순신 함대에 필수적인 요소이긴 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거북선 활용, 학익진 정도로만 설명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이순신 장군은 전투의 양상부터 철저히 바꾼 인물이다. 왜군은 이제껏 그들의 모태인 해적의 방법 그대로 수군을 움직였다. 그들은 배를 바다 위의 땅으로서 이용했다. 상대의 배로 넘어가 배 위의 육상전투를 벌였다. 군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조선 수군으로서는 대응할 수 없는 방식이다. 지는 전투는 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새로운 틀을 짰다. 배를 대지 않고 포격을 통한 진짜 해상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런 전술에서 학익진도 나온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하드웨어(귀선) 개혁' 에 가려 보지 못하던 이순신 장군의 '소프트웨어(전술) 개혁'을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버니큘러 디자인, 한복과 달걀꾸러미>
User imageUser imageUser image
최근 상영중인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보면 명성황후 역의 수애가 대략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한복은 넉넉해서 좋습니다. 나는 감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복은 여유롭게 입고 있는 사람을 감싼다. 살이 갑자기 쪘거나 빠졌다해도 조금 더 풀거나 감음으로써 조절할 수 있는 옷이다.

그리고 그런 한복이 물건을 담는 용도로 바뀌면 보자기가 된다. 가방과 다르게 보자기는 물건을 싸야만 입체적인 형상이 생긴다. 물건의 용량에 따라 보자기의 용량도 달라진다. 더구나 한국의 보자기는 중국, 일본과 달리 모퉁이에 끈이 있는 녀석까지 있어 그 적용범위가 더욱 커진다.

한 걸음 더 가서 달걀꾸러미를 보자. 우선 짚으로 싸서 완충작용을 했다. 좋다, 기본적인 안전포장이다.
그런데, 어? 달걀 윗 부분은 드러나 있다. 완충기능만 따진다면 부족한 디자인이다.
그렇지만 그 드러난 부분이 'fragile'이라고 소리쳐대는 빨간 딱지에 비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지 않는가? 쉽게 무뎌지는 빨간 스티커의 경고보다 달걀이 가려지지 않은 모습은 더 지속적인 경고 효과를 가져다 준다. 이런 달걀 꾸러미는 완충제라는 하드웨어적 기능 뿐 아니라 내용물의 연약함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소프트웨어적 기능까지 두루 갖춘 디자인이다.



이미 그의 다른 저서에서 본 듯한 내용을 별로 와닿지 않는 예(축구, 김치....)를 들어 설명해서 감탄보다는 불만이 많았던 책이다. (물론 그에 대한 기대치가 이미 높기 때문에 감탄이 적었긴 했다)
그렇지만 그의 앞선 저서들을 읽어보지 않았더라면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배신이라면 배신이겠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30 23:22 2009/10/30 23:22
이 글의 관련글
    이글의 태그와 관련된 글이 없습니다.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62

댓글을 달아 주세요


6인6색 인터뷰 특강: 화

(진중권, 정재승, 김어준, 안병수, 홍기빈, 금태섭, 한겨레출판, 2009)

쟁쟁한 인사들의 재밌고 뼈 있는 특강을 책으로 옮겨놓아 매년 집어들게 하는 인터뷰 특강 책이다.
올해 강연 역시 '화'라는 주제를 다양한 분야,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중권: 대중은 왜 화났고, 그 화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나라 대중에 관한 고찰이다. 우리의 냄비근성을 진중권 교수는 '구술문화'에서 찾는다. 일제강령기 직후 문맹률이 70~80%에 달했기 때문에 그 사이 서술문화가 맥이 약해졌고, 우리가 글을 찾은 지는 50여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할 때처럼 글을 통한 소통도 일시적인 특징이 많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끼워맞춘 기억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화를 내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던 때가 혜진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말할 때는 미처 몰랐지만, 글로 내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내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수 있게된다. 많은 경우 엉뚱한 대상을 향해 내 욕망을 표출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그 대상이 연예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재범군의 사태가 그러하고, 온갖 00녀들이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이슈가 되면 진실이 어떻든간에 눈물을 짜며 사죄한다. '공인'이라는 타이틀의 값이라고 대중도 본인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연예인들은 "착해진다". 네티즌들의 언어폭력에 힘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튀는 연예인"이 줄어든다. "튀는 연예인"은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관용범위를 넓혀주는 순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서태지

90년대 염색한 머리로 방송을 탔던 서태지

윤복희 여사

우리나라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윤복희 여사. 이렇듯 연예인들의 튀는 행각은 우리의 행동범위를 넓혀주기도 한다.


윤복희 씨가 계란세례를 맞으며 미니스커트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걸 그룹의 각선미를 양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서태지가 과감히 머리를 염색하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검은 머리 일색일지도 모른다. 먼저장서서 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데, 잘못된 분노가 그 곳에 터지면 생겨야 할 "튀는" 시도들이 위축될 것이다.


<금태섭: 분노의 법, 사형제>
사형에 대해 처음으로 깊게 생각해 보았던 건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을 때였다. 엄마가 입원해 계실 때, 병실 소파에 앉아 읽었던 책이었고, 공교롭게 엄마로부터 외삼촌 이야기를 들었다. 굳이 높이 올라가서 힘겹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예가 판사로 계신 외삼촌이었다. 사형을 선고하시느라 두 달 가까이 식사를 못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형제의 피해자는 사형선고를 받는 죄인 뿐만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를 죽이는 선고를 내려야하는 판사에게도, 그를 죽이는 형을 시행하는 자에게도 모두 상처이다. 물론 사형선고를 이런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금태섭 변호사 말대로 감정이 아닌 논리로 접근해야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오판의 가능성이다. 모든 상황과 선례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결론이 사형선고라 나왔을 때,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 오류가 없더라도 오판은 가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궁극적인 심판은 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죽을만큼 잘못했다는 판단을 과연 우리가 내릴 권한이 있는가? 신조차도 우리의 잘못을 죽은 이후에 판정하는 데 우리가 과연 앞서 죽일 수 있는 것인가. 죄인을 사회와 격리시킴으로서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야 구성원을 위한 길이다 할 수 있지만, 죄인을 죽임으로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안병수: 화난 음식이 화를 부른다>
새내기 시절 안병수씨의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을 보고 꽤나 충격적이었다.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면서 인스턴트 식품은 정식 식사보다 내게 더 익숙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 식품회사 직원이 고발하는 과자의 실태는 무시무시했다. 대형 식품회사 L사에 일하셨던 외삼촌(위에 언급한 외삼촌이 아닌..)과 식품공학과를 다니는 언니를 둔 나로서는 더 큰 배신감이었다. (물론 처음 몇 주 과자를 끊었지만, 역시 습관은 무서운지라 오늘도 찰떡아이스를 집어먹었다...) 그래도 요즘은 전과 달리 '나쁜 걸 먹고 있다'를 자각하고 먹는다는 점은 좀 다를까...그래서 더더욱 '나쁜 음식으로 인해 벼에 걸리게 되면 일찍 죽는 게 아니라 불행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건 본인만 불행한 게 아니에요.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해요.' 하는 말이 무서웠다.
화장품과 클렌징 제품들

과다한 화학물질을 넣은 화장품/클렌징 제품들 역시 꾸준히 팔리는 한 존속할 것이다.

공정무역 커피, 안데스의 선물

새로운 소비패턴으로 떠오르고 있는 공정무역 커피.

당신이 만약 어떤 식품을 구입했다면, 당신은 그 식품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겁니다. 지지하는 소비자가 있는 한 절대로 그 식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가공된 화학이 자연을 대체하는 것은 식품 뿐만이 아니다. 화장품에 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다. 나는 대학을 들어오면 매우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화장이었다. 엄마가 화장을 안 하시는 분이셨기에 화장에 대한 로망마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하려 하지 않는다. 화장품이 독한 화학물질이라는 것을 배웠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제라늄 향 나던 바디클린저(라고 쓰고 detergent, 계면활성제, 세제로 이해하자)도 버렸다. 현재는 순비누를 거품내서 씻는 것으로 대신한다. (한 때는 머리도 비누로 감았지만, 편리함에 져서 지금은 샴푸로 감는다.) 화장을 하면서 더더욱 건조해지던 피부가 순비누를 쓰면서 좋아지게 된 것을 느낀다. 한 때 가격에 혹해 향비누를 썼다가 다시 오돌토돌 올라오는 피부 때문에 일주일만에 버리기도 했다. (순비누 경우 대부분 일본 수입산이기 때문에 개당 3천원 내외의 가격이다. 그렇지만 그 하나로 폼클렌징과 바디클린저를 대체해서 쓴다고 하면 사실 오히려 저렴한 것이다) 물론 워낙 건성피부로 타고나서 겨울엔 필요한 부분에 로션을 발라주지 않으면 파충류 피부가 되어서 필요부분에는 쓰고 있다.

어제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자르는 데 미용사분이 그러시더라. 머릿결 좋다고. 요즘에는 다들 머리를 너무 자주 관리해서 머릿결이 좋은 분이 별로 없다고. 나야 거창하게 친환경관리를 한 것이 아니라 귀차니즘으로 방치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참 여러 방면으로 화학제품에 찌들어 살고 있구나 싶었다.


<김어준: 웃으며 화내는 방법> 강연 제목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생각나는 건 나 뿐?
김어준은 말한다. 자기만 신경 쓰는 사람은 이기적인 게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안 된 것이라고.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기 방어와 변호로 바빠 에너지를 다 소모해서 남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타자를 이해하는 능력, 여기서부터 지성이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지성의 특효약을 제시해준다. 연애와 여행.나로서는 100% 공감이다. 물론 연애든 여행이든 초보딱지를 뗏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짧은 경험으로도 나를 많이 키워주었다 생각한다. 내가 첫 연애를 할 때 나를 예뻐해주시는 선생님이 그러셨다.
아마, 그가 네 깊은 바다 속에서 건져 올려주는 보물들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진동'이 네가 그와 네 자신의 영혼을 더 민감하게 느끼고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빈다.
연애를 하면 우리는 상대 뿐 아니라 처음 만나는 자신을 배워간다. 나의 소중한 존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감에 속상해하며 우리가 얼마나 속좁은 존재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때로는 내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게 행동하며 이제껏 해온 방식과 다르게 세상에 대응해본다.


User image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할 때는 우리는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집에서 쓰던 방식들이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이제껏 해온 것과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영어를 솰라솰라 구사해도 그들은 겁먹지 않고 당연히(!) 스페인어로 답해준다. 터키에서 남자들의 대쉬는 시크하게 거절하지 못하면 오해사기 딱 좋다. '촉 규젤'이라고 하는 말은 정말 예쁘지 않아도 그저 여자면 공치사로 던져주는 칭찬이니 너무 부끄러워 할 필요도, 좋아할 필요도 없다. 인도에서 '보행자 우선주의'를 고집하면 차에 치여 인생마감하기 딱 좋다. 인도에서 우아하게 'would you like to...?' 하고 부탁하면 'pardon?'의 끝없는 고리에 빠져든다. 순천만에서 돌아오는 길은 해가 지면 캄캄하다. 새벽 3시에도 사람들이 나돌아 다니는 캠퍼스가 아니기 때문에 8시만 되면 조용히 잠드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진정한 문제해결력을 기를 수 있다. 남의 탓하고 궁시렁 거려봐야 나을 게 없다. 긴바지가 땅에 고인 물에 젖어가고 있다면 접어올려 빨래집게로 고정시켜야 한다. 원숭이에게 안경을 빼앗기면 전문가에게 부탁해서 되찾아야 한다. 일요일엔 가게문이 다 닫히는 곳이라면 토요일날 먹을 것을 챙겨놓아야 안 굶을 수 있다. 그 동네를 먼저 여행한 선배들의 조언을 새겨들을 줄 알아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꼭 언어가 아니어도 좋다. 눈빛, 몸짓, 표정을 읽으면서 타인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것, 그 것이 진정한 여행 아닐까...



올해 인터뷰 특강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부터 벌써 내년의 인터뷰 특강이 기다려진다. 어떤 주제를 어떤 이의 시각으로 보게 될까?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25 23:55 2009/10/25 23:55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61

댓글을 달아 주세요


뒤적뒤적 끼적끼적 : 김탁환의 독서열전

(김탁환, 민음사, 2008)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쓴 작가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든 건 이런 호기심이었다. 그 호기심에는 그 작가가 읽은 책들을 읽으면 나도 그처럼 이야기를 술술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둑놈 심보도 갖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에 나온 책들을 읽어 해치우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아직은 내게 어려워보이는 책이 태반이다. 글 쓰는 '노동'을 하는 작가의 내공을 언어영역 공부도 해본 적 없는 대학생이 넘본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를 절실히 느꼈다. 더구나 나의 독서 행태를 보자면 꽤나 미숙하다. 햄만 쏙쏙 골라 먹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위주로, 90년대 이후에 나온 책들로만 읽는다. 대하소설이라고는 대학 입학 때 내준 독서과제 때문에 의무적으로 읽은 '장길산'이 전부이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이라고는 '오래된 정원' 뿐이다. 지난 봄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가 손을 놓았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는 두께를 보고 뒤돌아섰다.

'아무리 추천한대도 나는 이런 책 당분간 안 읽을 거다'라고 어깃장 놓으며 넘긴 책장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불구코 그의 스토리 텔링에 낚여서 나는 어느새 인덱스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나중에 이 책 찾아 읽어봐야지.'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그런 식으로 붙은 인덱스 테이프는 모두 7개. 이 블로그에 이 책들의 리뷰를 빨리 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읽고 싶어진 책들..


'읽어야 할 책이 많기에, 써야 할 글이 넘치기에,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22 15:57 2009/10/22 15:57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60

댓글을 달아 주세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존 보인, 정회성 옮김, 비룡소, 2007, The Boy in the Striped Pyjama)

BBC에서 나온 동명의 영화를 보고 주저없이 주문해서 소장하게 된 책이다.
아직 어리기만한 아이 브루노의 시선으로 보는 아우슈비츠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때의 인물들이라 함은 아우슈비츠의 수감자 뿐이 아니다.
사령관으로 오게 된 브루노의 가족과 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인들, 가정교사와 가정부, 그러니까 그 곳의 독일인들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The Boy in the Striped pyjamas

영화 포스터. 두 아이 사이에 놓인 청조망이 끝없이 뻗어있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소설 vs 영화
영화 덕에 찾아 본 소설이니 영화와 비교를 좀 해볼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로빈훗'으로 조금 실망했던 BBC였는데 다시금 '역시 BBC!'라는 찬사를 다시 보내게끔 된다.
영화를 볼 때에도 스토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하여금 마음을 빼앗겼는데,
소설을 읽고나니 BBC의 각본 능력에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해마다 시대극을 내놓으며 쌓은 내공을 짐작케 한다.


각본 덕에 더 빛나는 장면들을 보자.

파벨에게 감사를 표하는 어머니

아들을 치료해 준 유태인에게 긴 머뭇거림 끝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어머니.

내 마음을 가장 졸이게 했던 장면 중 하나.
그네를 타다 다친 브루노를 치료해 준 건, 그 집의 부엌일을 보는 유태인 수감자 파벨이었다.
수용되기 전에는 의사였기에 완벽한 의료처치를 해준다. 그 이후 돌아온 어머니가 이를 알게 되었을 때 꽤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브루노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아우슈비츠 사령관의 아내이기도 한 그녀였다. 아들을 도와준 이에게 감사해야하는 어머니의 입장과 유태인을 저주하는 편에 서야하는 사령관의 아내 입장 사이에서 그녀는 오래 머뭇거리다 힘겹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장면은 사실 소설에서는 조금은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을 오래 붙잡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녀의 머뭇거림을 오랫동안 포착하면서 이데올로기보다도 결국은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을 따르는 모습을 강조한다.

브루노가 준 빵과 쿠키를 먹는 슈뮈에

브루노가 준 빵과 쿠키를 먹는 슈뮈에

늘 철조망 사이로만 만났던 슈뮈에가 어느 날 브루노의 집에 왔다.
물론 수감자의 신분으로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다. 유리잔이 작으니 작은 손으로 닦아야한다는 코틀러 중위의 '유태인=도구' 사고방식 덕택이다. 아무튼 원작에서는 브루노는 점심 때 먹다남은 닭고기를 내밀지만, 영화에서는 파티 때 놓일 빵과 쿠키를 준다. 물론 슈뮈에는 끼니가 더 중요할 것이고 단백질을 더 필요로 할 테지만, 끼니도 연명하기 힘든 아이에게 쿠키를 내놓는다는 것은 묘하게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면 되잖아'라던 프랑스혁명 때의 루머와 묘하게 겹친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명백히 잘못된 오류지만) 더구나 9살이라는 슈뮈에 나이를 생각한다면 닭고기를 쿠키로 각색한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예기치 못한 가스실 행
영화에서는 결말이 좀 더 극적이다.
소설에서는 가스실에 갇히는 것으로 두 아이의 이야기는 끝나고, 그의 가족들도 그의 행적을 몇 달 후에나 찾게 된다. 그에 비해 영화에서는 가족들은 사소한 시간 차이로 브루노를 구하지 못하고 비오는 날 질척이는 진흙에서 헤매며 관객들의 감정을 충분히 자극한다. 클로징 화면 역시 수감자들이 벗어놓은 옷을 점점 멀리 잡으며 가스실의 여운을 크레딧까지 옮긴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몇 장면이 각색되면서 더 빛을 발하지만, 이는 각색 이전에 소설 자체가 충분히 매력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3인칭 시점이지만 소설 대부분은 브루노의 행동과 생각을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좀 더 직접적으로 브루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아버지가 강요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경례를 브루노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정도로 이해한다든지, 왜 의사가 병원에 있지 않고 부엌에서 웨이터 일을 하는 지 궁금해 하는지, 왜 부모님은 아이들의 말을 가로채도 되는 지 등등..

또한 메인 주제에 집중해야 하는 영화는 덜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가지치기 해야하기에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링크와 상황 묘사가 존재한다. 늘 조용조용한 모습으로 의사표명을 주저하는 가정부 마리아의 사연은 그녀의 성격 뿐 아니라, 브루노가 알지 못했던 전쟁 이전 자상하던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낸다. 또한 싫은 표정을 감추면서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기력하던 그 시대의 일반 독일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하다.

역자 후기.. 있으니만 못한.
맨 마지막 장은 두 장 반 남짓한 역자 후기. 참고 읽기가 힘들었다.
3/4 이상을 새로운 해설 없는 줄거리 요약에 할애한다. 초등학생의 독후감을 읽는 듯한 느낌.
그리고 줄거리 요약이 끝나고 붙는 해석에는 다른 처지에 있는 두 아이의 뜨거운 우정에 관한 감상 뿐이다.
물론 역자가 말하는 대로 친구와 우정 역시 이 소설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렇지만 우정은 이 소설의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으니 매우 닮은 두 아이를 통해 민족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의 동일성을 이야기하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독일인들을 보며 전쟁과 학살의 양날성을 드러내고, 부모-자식, 남편-아내, 군인-유태인의 관계를 통해 강자의 무례함을 꼬집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런 점들은 다 생략해버린 후기는 마치 나무를 옮기는 데 나무 기둥은 버리고 가지 하나만 집어든 모습이다. 전체적인 번역수준을 보았을 때 거슬리지 않는 번역이라 생각했는 데 후기를 읽는 순간 '(번역자가 번역을 잘 한게 아니라)원작의 문체가 간결해서 번역이 잘 된거였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후기가 없었으면 마지막 책장을 여운을 가지고 넘겼을 텐데, 이건 좋은 소설을 다 읽고나서 화내며 책을 덮는 꼴이 되었다.

역자도 물론 여러 생각을 넘치도록 했겠지만, 번역을 끝내고 후기를 쓸 무렵엔 기력이 다 해서 그랬을 거라 이해는 하지만 씁쓸한 맛은 쉬이 가시지가 않는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18 01:06 2009/10/18 01:06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9

댓글을 달아 주세요

불꽃처럼 나비처럼

(야설록,형설Life,2009)

영화를 보고나서 아쉬웠다.
명성황후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책을 샀다.
당연히 소설을 영화로 옮기면서 많은 부분이 편집되었을테니까.
영화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아니다. 2시간 남짓 하는 시간에 모든 스토리를 마치려면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억지로 집어넣어서 사람을 헤메이게 하다 끝나는 것보다야 낫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화가 멜로라면 소설은 무협이다.
읽는 내내 '내가 더 읽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더 읽고 싶었던 건 무명이 아닌 명성황후인데, 너무나 명백히 소설의 주인공은 무명이다.
부제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여인, 명성황후 민자영'이란 부제가 뻔뻔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무명과 이뇌전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무명(조승우 역)과 이뇌전(최재웅 역)의 결투씬.

그럼에도 불구코 사흘도 안 되는 시간에 다 읽은 것은 기대했던 부분은 아니어도 영화가 건너 뛰고 갔던 부분을 메꿔주었기 때문이다. 이뇌관이 왜 그렇게 그를 못 잡아 안달했는지(영화에서는 '고귀한 분께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았다'라는 말을 하긴 하나, 그를 죽이기엔 그 동기가 너무 약하지 않나.), 어떻게 일개 살인청부업자가 황후의 최측근 금군이 되었는지 등등. 영화는 아무래도 여성과 여성들이 같이 끌고오는 남자친구를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멜로에 초점이었다(그래서 나는 냉큼 그 영화를 본 거다). 소설에서는 좀 더 무명의 '신화적 영웅 행보'에 초점을 둔다. 횡보스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수련을 하고 진정 영웅이 되는 과정이 세세히 묘사된다. 다만 불만은, 너무나 무협지 스타일이라는 것? 물론 그런 것을 바라는 독자로서는 반가울 것이다. 하지만 무협지가 생소하고, 초초초현실적인 무술(혹은 작가의 주장대로 무도武道)을 반기지 않는 사람, 혹은 영화에서 전투씬들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주쳐야하는 전투씬들이 조금은 지겨울 것이다.

명성황후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명성황후 역을 맡은 수애

영화에서 가장 여성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는 장면은 아마 고종의 질투가 극에 치달은 정사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고종은 질투는 커녕 '아웃 오브 안중'이다. 그래서 영화같은 멜로를 기대한 나로서는 조금 맥빠지기도 했다. 조승우 씨가 연기한 무명은 물론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나는 너무나 명백히 명성황후를 편애하고 있고, 그래서 소설에서 그려지는 명성황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항렬로 따지면 외대고조할머니쯤 되는 명성황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외가가 여흥 민씨이고, 엄마가 31대로 추정. 지금도 외가는 여주에 있다), 외교와 개화에 앞장섰던 여성정치가라 여기기 때문이기도하다.

정리. 영화가 그려내지 못한 정치인으로서의 명성황후의 모습을 기대하지 말 것.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다룬다'는 명성황후의 의견 표명이 몇 번 등장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 누구와 어떤 조율을 하고, 어떤 외교를 하는 가에 대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명이란 인물에 끌렸고, 그의 영웅적 서사를 더 알고 싶다면 읽을 만 할 것이다

.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15 16:12 2009/10/15 16:12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8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 시정곤, 박영준, 책과함께, 2008)

책 제목이 반을 먹고 들어간다는데 이 책의 제목이 좀 더 자극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좋은 책이었다. 책의 서문부터 '나는 학교에 간다'를 한글이 없다면 어떻게 표기했을까라는 재미있는 상상으로 독자를 한글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 책의 가치는 흔히 한글에 관한 글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글'이란 찬사만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리를 정확하게 옮겨놓을 수 있도록 음운학을 철저히 바탕한 글자라는 점은 분명히 '세계 최고'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려하지 않는 한글의 한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특히나 음소문자이지만 음절문자처럼 음절을 모아쓰는 특징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한글의 목적이 애초에 한자의 음을 표기해서 위해서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 글자꼴 역시 한자의 네모꼴을 빌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한글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무작정 찬미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왜 그렇게 시각디자이너들이 영어를 남발하는 지 생각해본 적 있는지? 한글의 ㄱㄴㄷ 하나 하나씩을 보면 분명 기하학적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쓰듯이 모아쓰기를 하면 '그'자 처럼 간단한 모양도 '값'같은 복잡한 모양도 같은 크기의 네모틀에 넣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한글을 통한 문화확산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반포 오십여년만에 향촌의 일반 백성, 노비, 부녀자, 어린이들까지도 익힐 수 있었던 상황을 문헌을 통해 확인시켜준다. 아직도 높은 문맹률때문에 고생하는 나라들이 많다. 굳이 먼 제3세계까지 않더라도 옆나라 중국만 해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든 계층에서 글을 통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황이 15세기부터 가능했다는 점은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12 15:08 2009/10/12 15:08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열외인종 잔혹사

(주원규, 한겨레출판, 2009)

《열외인종 잔혹사》는 혁명의 소요에 말려든 ‘열외인종들’의 무용담이다. 극우파 퇴직 군인, 정규직을 꿈꾸는 된장녀, 게임에 청춘을 파묻어버린 백수청년, 그리고 노숙자가 그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이 21세기형 신종 열외인종들이 반란을 꿈꾼 적도 없고, 그들을 둘러싸고 벌이지는 일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 혁명을 일으킨 양의 무리들은 거대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갇혀버린 이 시대의 왜소하고 무력한 개인들이다. 혁명의 꿈조차 ‘망상’에 차압당하고 개인의 목소리는 거대한 권력과 미디어의 음모에 압살당한 우리 시대를 통렬하게 풍자한 <열외인종 잔혹사>는 그리하여 지독하게 웃긴, 그러나 슬픈 잔혹극이다. - 정은경 (문학평론가)

이른바 찌질한 서울시민 넷. 이 소설은 그들의 비루한 삶을 그려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안도와,
나도 떨어지기 시작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위기감을 안고 작가가 그려내는 디테일한 그들의 일상에 몰입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타지마할이라 작가가 지칭하는 코엑스 몰에서 일어난,
양머리 테러/쿠데타와 그 곳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얽혀들어 온 네 명의 찌찔한 영웅들.

한 번이라도 나의 무능력이 아니라, 빌어먹을 사회구조 때문에 내가 이 꼴이라는 자조를 해보았거나,
나는 이제 한 물이 가서 나의 진면목을 모두가 코웃음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거나,
현실 도피가 현실을 사는 방법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어도 내 자신이 볼품없다 생각을 해 본 작자라면,
이 소설에 몰입하게 될 거라 자신한다.

나는 어떤 유형이었느냐고?
........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09 00:15 2009/10/09 00:15
이 글의 관련글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6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위험한 독서

(김경욱, 문학동네, 2008)

제목부터 읽고 싶지 않은가.
위험한 독서.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읽고 부터 보관함에 넣어두고 있다가
받을(;) 장학금으로 주문했다.

이 책은 작가의 단편선이다. 이를 모르고 단편 '위험한 독서'가 끝나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할 떄 참 아쉬웠다. 나 역시 독서치료사를 더 읽고 싶었고, 나를 위로해 줄 책을 처방받길 바랬다.
그렇지만 그런 아쉬움도 잠시, 다른 단편들에 빠져들었고,
새벽 4시가 넘어 끝난 과제 뒤에도 나는 위험하게 이 책을 집어들고 침대에 누워 읽었다.
작가 소개만 남겨두고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시계는 다섯시 반.
그의 상상력에 감탄 이전에 공감이 먼저 따라온다.
그리고 이윽고 실화가 아닌 단편 소설이어서 따라오는 아쉬움.

'고독을 빌려드립니다' 이야기의 '고독'과 '너그러움'을 소박한 버전으로 빌려보고 싶다면,
이 책을 집어들어보길.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07 10:07 2009/10/07 10:07
이 글의 관련글
TAG ,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5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슈거 푸시

(이명랑, 작가정신, 2005)

왜 저렇게 사나, 싶은 주부가 등장한다.
군인인 남편 말에 복종해야 하고,
자신에게 늘 열등감을 심어주는 엄마에게 복종해야하는 삼심대 아줌마.

주인공과 엄마의 사이는 내겐 참 낯선 모녀지간이다.
엄마가 딸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죽을 때까지 그 어떤 벌에게도 로열젤리를 내놓지 않는 여왕벌'의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의 엄마는 꽤나 생소하다. 그럼에도 불구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느끼게 하는 작가의 설득력에 감탄한다.

가부장적 가치들이 약육강식 세계의 무기로 진화할 때의 처참함과 그런 삶에서 발버둥치는 주인공을 눈여겨보자.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책을 도피처로 삼고 매일 도망다니는 그녀. 스트레스와 독서량은 비례관계라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0/06 17:30 2009/10/06 17:30
이 글의 관련글
    이글의 태그와 관련된 글이 없습니다.

Trackback :: http://elcamino.namoweb.net/tc/books/trackback/54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