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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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권상미 옮김, 21세기북스, 2003)



손 오그라드는 감상 따위는 없다

한 동안 여행기를 끊었다. 지금도 검증받지 않은 여행기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너도 나도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요즘, 너도 나도 그 경험을 책으로 내고 있기 때문이다. 값비싼 용지에 글보다 사진을 더 많이 담아 내는 그런 류의 책들에서 느껴지는 허세가 싫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어떻게 썼길래 여행기가 '웃기다'란 평을 받는 걸까?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시원하다'. 솔직한 글이 가장 감동스럽다 하지 않는가. 그가 대범하게 허풍을 칠 언정 그 게 허풍임을 떳떳히 내보이지, 감동받지 않았으면서 감동한 척하지 않는다. 별 거 없었다면 별 거 없었다고, 돈이 아깝다고 쓰고, 누가 불친절했다면 불친절했다고 쓴다. 사실 여행, 특히나 배낭여행 중에는 감동스런 순간보다 짜증이 스미고 화가 불뚝불뚝 솟는 때가 더 많다. 이 책 역시 그런 배낭여행 같다. 감탄보다 불만이 100배는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의 투정이 귀엽다. 으레 누가 옆에서 투덜투덜 거리면 3분 이상 듣기 힘든 게 인간인데, 이 사람 투정은 책 한 권 가득해도 웃음이 난다. 상상과 유머가 가득한 탄탄한 필력 덕택이다. 잠깐 여기 오신 분들도 그의 유머러스한 투정을 감상해보시라고 옮겨보겠다.

브룩은 (중략) "웨이터들과 휴대품 보관서 직원들이 사람을 개똥 취급한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는 '정확하게' 배설물 취급을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이터들에게서는 분명 유럽 점객업소의 웨이터들 일부에게서 볼 수 있는 우월감을 읽을 수 있었다. 젊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태도에 주눅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댁이 아무리 잘나봐야 지금 앉아 있는 사람은 나이고 서빙하는 사람은 자네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댁의 직업이 음식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서 홀까지 나르는 것 말고 달리 더 어려운 일도 아니잖고? 그렇다면서 댁이 그렇게 더 우월하다고 느낄 만한 대상도 별로 없는 것 아닌가? 있다고 해봐야 부동산 중개인밖에 더 있어?'



겹쳐 오는 경험, 킬킬대는 웃음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출간 된 건 2003년이지만 여행과 출간은 92년도 일이다. 그러니 지금과는 이제는 18년이란 긴 시간 차이가 있다. 돈도 유로화가 생기기 이전이고, 동유럽은 이제 막 공산주의를 깨고 나오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코 많은 공감을 일으킨다. 이는 비단 나도 가본 곳을 저자가 언급할 때 뿐이 아니다. 내가 가보지 않았어도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과 여행자들의 풍습(?)들이 간신히 잠재워둔 '방랑기'를 슬슬 건드려댄다.

낯선 곳에 던져진다는 건, 마치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은 경험이다. 특히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은 더욱. 모든 것이 키랄 문자로 써져있는 마트에서 먹거리를 산다 하자. 그러면 어느 가격표가 어느 상품을 가르키는 지 알기 위해서 열심히 그림맞추기를 해야한다. 가격을 알았다면 머릿 속으로 환율을 대충 계산해보고 이게 과연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인가 따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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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행 중에 누리는 호사를 꼽으라면 단연 카페 죽치기다. 여행자에게 노천카페는 천국이다. 물론 카페마다 천국의 질이 달라지긴 하지만, 작은 음료와 간식을 즐기면서 그 날 하루 느낀 이야기들을 일기에 쓰기도 하고, 편지를 쓰기도 한다. 운 좋으면 동행과 수다를 떨 수도 있고, 더 운이 좋으면 현지 사람과 말을 틀 수도 있다. 그런 운도 없고, 글 쓸 마음도 없으면 그냥 사람들을 관찰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비록 저녁 어스름까지 카페에서 뭉기적거리던 습관이 여직 남아 한국인답지 않게 게으르게 살고 있지만.

침대에 엎드려 읽던 필자를 일어나 큭큭대게 만든 건 역시나 '베스트 드라이버'들이다. 물론 필자가 만난 베스트 드라이버들이 이탈리아인이나 동유럽 사람들은 아니지만, 절로 잡을 곳을 찾게 하는 기사들 이야기라는 점은 같다. 바로 옆이 벼랑이든 90도로 꺾어지는 도로든 괘안치 않고 뒤돌아 승객과 대화하고, 지나는 차에게 욕을 쏟아붓고, 화내고 어깨 으쓱하는 데 더 바쁜 기사들. 인도에서는 아예 백 미러나 사이드 미러 하나가 없다. 그렇다고 투정을 부리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달고 운전하면 '베스트 드라이버'가 아니다는 현지인의 대답만을 들을 것이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두 개의 얼굴

시원섭섭. 이 말만큼 말도 안되면서 기막히게 잘 표현하는 말이 어딨을까. 늘 여행의 끝은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과 '이제는 집에 가는구나'하는 마음 사이에서 줄을 탄다. 감상에 쉽사리 젖어들지 않던 저자도 여행의 끝에서는 마음일 몰랑몰랑해지나보다.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중략)
그리고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잏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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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이제 졸업하고 취직하고 나면 한 십년은 여행 못 갈거다"라는 엄마 말에 못내 서운했던 마음이 이 책을 읽으면서 동동 떠올랐다. 몽골, 중남미, 호주 등등 못 가봤으면서 위시리스트로 올려놓은 곳들을 뒤로하고 유럽으로 향하고 싶어졌다. 이스탄불의 골든혼과 탁심스퀘어에서 시작해 영국의 런던까지, 좀 더 느릿하게 훑으면서 다녀오고 싶은 욕심으로 계좌 잔액만 애꿎이 확인했다. 몇 년 안에 기필코 다시 스페인 어느 노천카페에서 날 저물어가도록 진한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테다! 그 몇 년이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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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쓰면 배가 아픈 속 좁은 글쟁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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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1:46 2010/02/2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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