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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9 아리랑: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7)
아리랑
님 웨일즈. 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동녘, 2005, Song of Ariran

이데올로기에 무지한 자, 아리랑을 읽다

다시 한 번 나의 무식함을 고백하자면, 나는 코뮌도 뭔지 몰랐고, 레닌과 스탈린의 사상이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며, 장제스와 마오쩌둥도 중국인이라는 것 밖에 잘 몰랐다. 문맥에 의해 뜻을 알게되리란 희망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었으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코뮌이 뭔지 몰랐고, 결국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반권위적인 공산주의 커뮤니티'라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필자는 일생에 이데올로기로 고민해본 적이 없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뭔지 심각히 궁금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앳된 목소리로 하는 "공산당이 싫어요" 선전을 비웃은 게 다였다. 이런 전무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읽으려니 책장이 앞 뒤로 계속 오가야 했고, 읽은 문단을 다시 읽어야 했다. 긴장감으로 땀을 쥐어야 할 부분에서 사건의 인과관계를 모르니 갸우뚱거려야 했다. 이 책이 한국근현대사 수업도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끝까지 읽지 않았을 거다.



혁명가가 사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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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혁명을 가르쳐 줘, 나는 사랑을 가르쳐줄게.
강지환과 한지민씨가 주연이었던 드라마 <경성 스캔들>에 나오는 대사다. 본 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독립투사 나여경(한지민 역)에게 사랑은 혁명 이후로 미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자꾸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던 선우완(강지환 역)은 냉담하던 태도를 버리고 혁명에 가담하고, 나여경 역시 그런 그에게 마음을 연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나는 어떤 아가씨와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1923년 이래 이 문제로 내 혁명활동이 절대로 방해받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해 왔소.
마치 선우완을 밀어내던 나여경의 대사를 옮겨놓은 듯한 이 대사는 김산이 류링에게 했던 말이다. 류링은 선우완과 달리 혁명에 적극적이던 인물로 상황은 다르지만, <경성 스캔들>에서 전하고자 했던 혁명가의 사랑과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사랑은 남자나 여자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아요. 오히려 더 용감하고 더 결단력 있게 만들지요. (중략) 혁명은 하나의 추상물이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중략) 당신은 자기 하나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거절하고 있어요. (중략) 당신의 속 좁은 이기심이 당신을 더욱 훌륭한 혁명가로 만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나 드라마와 달리 이 진짜 혁명가의 연애는 장미빛으로 끝나지 못한다. 혁명과 가정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 지에 대한 의견차이는 연애가 진행될 수록 벌어지고, 점점 그 간격은 건널 수 없는 크기까지 되어 류링과 김산은 헤어진다.

김산의 아내와도 그리 밝은 이야기는 아니다. 김산의 처는 비록 직접적으로 혁명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그를 돕기 위해 숱한 희생을 감내해야했다. 부부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김산은 혁명조직을 위해 만주에 가 있었으며 얼마 뒤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다.



자신에게 승리한 자가 얻어낸 확고한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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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본명 장지락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진 언어를 통해 나는 그의 뜨거운 생애를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사상을 이해할 지혜는 부족하지만, 살아 넘치는 회고는 무지한 21세기 학생에게도 저릿하도록 다가왔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 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아리랑을 부르며 죽으러 가는 길에서 기적같이 살아왔을 때, 그의 동지들은 그를 스파이로 의심했다. 그런 모략을 퍼뜨린 한(韓)을 찾아간 김산은 그를 죽이겠단 독기로 가득했다 했다. 그런 그가 한(韓)을 해하지 않고 돌아온 이후- 그 절망에서 허무에 빠져들고, 자살을 생각했던 시기, 그는 독서와 가혹한 자기성찰을 통해 새로운 지적 성년기를 들어섰다주1. 학생에서 민족주의자로, 이상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혁명가주2 로 옮겨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만들어 온 씨앗을 바야흐로 틔워낸다. 김산은 이 성찰을 통해 자신이 성숙한 인간이며 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추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결코 꺾인 일이 없는 용기와 힘을 지녀왔음에, 그리하여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음에 눈뜬 것이다.

어떤 꾸며낸 영화가, 소설이 이 보다 진할 수 있을까? 단순히 여러 고문에도 살아남는 것에 그쳤다면 결코 이런 울림이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 절망의 끝에서 새롭게 부활한 그의 이야기는 혁명가로서 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승리이다. 비록 그의 말처럼 그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그의 혁명 역시 실패했고, 그마저도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지만, 그는 그 자신에 대해 승리했다. 그 치열한 전투를 오롯이 담아내 이 철없는 후손들에게 올 수 있게 해 준 님 웨일즈 여사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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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9 14:00 2010/03/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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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세일 2010/06/22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글을 잘쓰시네요.. 존경합니다 저도 꼭 그렇게 되고 싶어요..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이런 훌륭한 글을 쓸수 있는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 우연아닌우현 2010/06/23 11:32  댓글쓰기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 그러나 실상은, 이 글을 쓰기 전에 수업 과제로 에세이를 써 냈다랄까요^^;; 과제 하면서 생각을 많이 정리했던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슴 뭉클해지는 사람으로서의 혁명가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언제 한 번 용기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