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책 읽기

'아우슈비츠' 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18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24)
  2. 2009/09/16 안네의 일기 (5)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존 보인, 정회성 옮김, 비룡소, 2007, The Boy in the Striped Pyjama)

BBC에서 나온 동명의 영화를 보고 주저없이 주문해서 소장하게 된 책이다.
아직 어리기만한 아이 브루노의 시선으로 보는 아우슈비츠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때의 인물들이라 함은 아우슈비츠의 수감자 뿐이 아니다.
사령관으로 오게 된 브루노의 가족과 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인들, 가정교사와 가정부, 그러니까 그 곳의 독일인들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The Boy in the Striped pyjamas

영화 포스터. 두 아이 사이에 놓인 청조망이 끝없이 뻗어있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소설 vs 영화
영화 덕에 찾아 본 소설이니 영화와 비교를 좀 해볼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로빈훗'으로 조금 실망했던 BBC였는데 다시금 '역시 BBC!'라는 찬사를 다시 보내게끔 된다.
영화를 볼 때에도 스토리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하여금 마음을 빼앗겼는데,
소설을 읽고나니 BBC의 각본 능력에 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해마다 시대극을 내놓으며 쌓은 내공을 짐작케 한다.


각본 덕에 더 빛나는 장면들을 보자.

파벨에게 감사를 표하는 어머니

아들을 치료해 준 유태인에게 긴 머뭇거림 끝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어머니.

내 마음을 가장 졸이게 했던 장면 중 하나.
그네를 타다 다친 브루노를 치료해 준 건, 그 집의 부엌일을 보는 유태인 수감자 파벨이었다.
수용되기 전에는 의사였기에 완벽한 의료처치를 해준다. 그 이후 돌아온 어머니가 이를 알게 되었을 때 꽤나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브루노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아우슈비츠 사령관의 아내이기도 한 그녀였다. 아들을 도와준 이에게 감사해야하는 어머니의 입장과 유태인을 저주하는 편에 서야하는 사령관의 아내 입장 사이에서 그녀는 오래 머뭇거리다 힘겹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한다. 이 장면은 사실 소설에서는 조금은 건조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당혹스러움을 오래 붙잡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녀의 머뭇거림을 오랫동안 포착하면서 이데올로기보다도 결국은 본성에서 나오는 선함을 따르는 모습을 강조한다.

브루노가 준 빵과 쿠키를 먹는 슈뮈에

브루노가 준 빵과 쿠키를 먹는 슈뮈에

늘 철조망 사이로만 만났던 슈뮈에가 어느 날 브루노의 집에 왔다.
물론 수감자의 신분으로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다. 유리잔이 작으니 작은 손으로 닦아야한다는 코틀러 중위의 '유태인=도구' 사고방식 덕택이다. 아무튼 원작에서는 브루노는 점심 때 먹다남은 닭고기를 내밀지만, 영화에서는 파티 때 놓일 빵과 쿠키를 준다. 물론 슈뮈에는 끼니가 더 중요할 것이고 단백질을 더 필요로 할 테지만, 끼니도 연명하기 힘든 아이에게 쿠키를 내놓는다는 것은 묘하게 '빵이 없으면 쿠키를 먹으면 되잖아'라던 프랑스혁명 때의 루머와 묘하게 겹친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명백히 잘못된 오류지만) 더구나 9살이라는 슈뮈에 나이를 생각한다면 닭고기를 쿠키로 각색한 것이 더 잘 어울린다고 본다.

예기치 못한 가스실 행
영화에서는 결말이 좀 더 극적이다.
소설에서는 가스실에 갇히는 것으로 두 아이의 이야기는 끝나고, 그의 가족들도 그의 행적을 몇 달 후에나 찾게 된다. 그에 비해 영화에서는 가족들은 사소한 시간 차이로 브루노를 구하지 못하고 비오는 날 질척이는 진흙에서 헤매며 관객들의 감정을 충분히 자극한다. 클로징 화면 역시 수감자들이 벗어놓은 옷을 점점 멀리 잡으며 가스실의 여운을 크레딧까지 옮긴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몇 장면이 각색되면서 더 빛을 발하지만, 이는 각색 이전에 소설 자체가 충분히 매력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3인칭 시점이지만 소설 대부분은 브루노의 행동과 생각을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좀 더 직접적으로 브루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아버지가 강요하는 '하일, 히틀러'라는 경례를 브루노는 '좋은 하루 되십시오' 정도로 이해한다든지, 왜 의사가 병원에 있지 않고 부엌에서 웨이터 일을 하는 지 궁금해 하는지, 왜 부모님은 아이들의 말을 가로채도 되는 지 등등..

또한 메인 주제에 집중해야 하는 영화는 덜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가지치기 해야하기에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들 사이의 링크와 상황 묘사가 존재한다. 늘 조용조용한 모습으로 의사표명을 주저하는 가정부 마리아의 사연은 그녀의 성격 뿐 아니라, 브루노가 알지 못했던 전쟁 이전 자상하던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낸다. 또한 싫은 표정을 감추면서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기력하던 그 시대의 일반 독일인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하다.

역자 후기.. 있으니만 못한.
맨 마지막 장은 두 장 반 남짓한 역자 후기. 참고 읽기가 힘들었다.
3/4 이상을 새로운 해설 없는 줄거리 요약에 할애한다. 초등학생의 독후감을 읽는 듯한 느낌.
그리고 줄거리 요약이 끝나고 붙는 해석에는 다른 처지에 있는 두 아이의 뜨거운 우정에 관한 감상 뿐이다.
물론 역자가 말하는 대로 친구와 우정 역시 이 소설에 중요한 요소이긴 하다.
그렇지만 우정은 이 소설의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으니 매우 닮은 두 아이를 통해 민족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의 동일성을 이야기하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독일인들을 보며 전쟁과 학살의 양날성을 드러내고, 부모-자식, 남편-아내, 군인-유태인의 관계를 통해 강자의 무례함을 꼬집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런 점들은 다 생략해버린 후기는 마치 나무를 옮기는 데 나무 기둥은 버리고 가지 하나만 집어든 모습이다. 전체적인 번역수준을 보았을 때 거슬리지 않는 번역이라 생각했는 데 후기를 읽는 순간 '(번역자가 번역을 잘 한게 아니라)원작의 문체가 간결해서 번역이 잘 된거였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후기가 없었으면 마지막 책장을 여운을 가지고 넘겼을 텐데, 이건 좋은 소설을 다 읽고나서 화내며 책을 덮는 꼴이 되었다.

역자도 물론 여러 생각을 넘치도록 했겠지만, 번역을 끝내고 후기를 쓸 무렵엔 기력이 다 해서 그랬을 거라 이해는 하지만 씁쓸한 맛은 쉬이 가시지가 않는다.


Writer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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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쓰면 배가 아픈 속 좁은 글쟁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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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01:06 2009/10/18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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