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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26 푸른 눈, 갈색 눈;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10)
푸른 눈, 갈색 눈 - 10점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한겨레출판

우리가 흑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교실에서 시작된 차별 실험

이 책의 시작은 1968년 마틴 루터 킹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전형적인 백인 마을에서 백인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제인 엘리어트는 마틴 루터 킹이 죽은 다음 날 학교에서 아이들과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 날 밤 엘리어트는 깊은 고민 끝에 교실 실험을 꾸민다.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수업이다. 이후 이 수업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PBS 피디 윌리엄 피터스(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에게 말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단지 인종적 편견은 비합리적이고 인종차별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우리는 모두 그런 말을 듣고 자라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적절한 때에 그 말들을 떠벌려요.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다른 사람이 차별하는 것을 용인하고, 차별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전날 밤 저는 제 학생들이 진짜로 차별이 무엇인지, 어떤 기분인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들 스스로 개인적으로, 깊게 느끼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했어요.
실험은 이틀 동안, 반 아이들을 푸른 눈과 갈색 눈으로 나누어 대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하루는 갈색 눈을 가진 사람이 높은 사람, 다음 날은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낮은 사람이 되는 작은 사회가 만들어졌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은 지원하나 자동 자막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차별의 상처가 가져온 울림

차별수업에 참여한 아이들.

"우수한" 푸른 눈의 아이들이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눈 색깔이 보이지 않아도 아이들이 선 자세만으로도 어느 아이가 푸른 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PBS


아이들은 실험을 시작한 지 한 시간만에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어제까지 가장 친했던 푸른 눈을 가진 친구를 소외시켰다.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고 너무나 쉽게 믿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교장의 눈동자도 갈색일 것이라 짐작했다. 다음 날 푸른 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실험이 끝난 뒤 아이들은 아래처럼 글을 썼다.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을 꽁꽁 묶어버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뭐든지 먼저 했고, 우리는 뭐든지 나중에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분이 더러웢ㅆ다. 금요일처럼 내가 똑똑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차별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마틴 루터 킹은 흑인을 차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 데비 앤더슨
갈색 눈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은 갈색 눈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의 절반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푸른 눈을 가졌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다. 갈색 눈을 갖니 사람들의 눈을 멍이 들도록 때려주고 싶었다. - 데니스 룬드

그렇다면 왜 아이들은 실험인 줄 알면서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철썩같이 믿었고, 차별에 그토록 화가 났을까? 엘리어트는 말했다.
이 실험이 또한 차별의 결과가 어떻게 편견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확정짓는 경향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실험의 등식은 아주 간단해요. 집단을 선택하고 그들을 차별합니다. 그들이 열등하게 보이고 열등하게 행동하도록 몰고 갑니다. 그런 다음 그들이 보이고 행동하는 방식을 열등함의 증거라고 지적합니다. 굽실거리도록 강요당해온 사람은 외부인 눈에는 굽실거리고 싶은 사람으로 보일 거예요. 결국,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는 교육을 덜 받은 성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 아이가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 혹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단지 멍청하게만 보이겠죠.
현실이 그렇지요. '열등한' 집단은 열등한 일을 하지 않던가요? 그들은 끊임없이 지적당해오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들은 못마땅해 보이고, 부주의하고, 불행한 사람처럼 되어버리지 않았나요? 이건 우리가 고용에서 흑인을 차별하면서 그들이 마루를 닦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혹평할 때처럼, 정확히 우리 모두가 해온 짓 아닌가요?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덜 떨어진' 존재로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좋은 학교에서 평균 이상의 성적을 받던 나는 조별 활동이 있을 때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던 아이였다. 나의 '품격'을 위해 대놓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나와 반대로 행동하던, 성적이 그닥 좋지 않고 조별 활동에 '나 몰라라'하는 아이들을 나는 무임승차라고 여기던 아이였다. 그러던 내가 무임승차를 했다.

조별 작품을 내야했던 대학교 2학년 수업. 나는 여느 활동 때처럼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내가 내놓은 모델들은 형편없었다. 당연히 제외되었다. 이해했다. 더 좋은 대안들을 따르는 게 모두를 위해 좋으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조 활동에서 제외되어 갔다. 내가 만든 모델이 아니니 그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렇다고 공부와 달리 만들기에 재주가 있지도 않았다. 내 딴엔 페인트 색상도 제안해보고 리서치도 더 하고, 동생 시켜 실험도 했지만 이미 질주에서 딸리기 시작한 나는 더 멀리 뒤쳐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거리가 내가 따라잡기엔 너무 멀다라고 느낄 시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더하겠어? 내가 무슨 노력을 해도 조에 민폐만 끼칠 뿐이야......, 그냥 얘들이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두자. 나는 손대지 않는 게 나아.
피부색이나 눈동자처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로 시작된 차별은 아니었지만 '나는 열등한 존재'라는 믿음은 조원들에게 시작해 내 안으로 침투해왔다. 결국 나는 친구들이 도색하는 작업을 지켜만 보았다. 너무나 부러워서 그들의 작업복처럼 내 작업복에도 일부러 페인트를 묻혀보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지만 마음은 며칠 꼬박 일한 것보다 피곤했다. 조원들만 보여도 움츠러들었다. 내가 참 보잘것없는 사람같았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학기와 함께 끝났고, 새 프로젝트는 다른 조원들과 하면서 예전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경험이 소극적인 조원, 공부 못하는 아이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배제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배제 당하기 전에 한 걸음 물러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진정 겪어보지 않으면 물러나는 사람이 이기적인 무임승차자, 열등한 존재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바로 그 소외당하는 자에게까지 스며들어 '나는 열등한 사람, 시도해봤자 못 할 거야'라고 속삭인다.




조금 더 안전한 시도, 효과는 어떨까?

차별방지 연극수업

버스 타기를 거부한 흑인 여성 로자팍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재창조해낸 차별방지 연극수업 아이들


내가 열등한 존재였던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배제되는 사람의 심정을 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차별 실험에 참여했던 아이들은 다른 차별 상황에서 자신이 차별당할 때 느꼈던 분노와 좌절을 떠올렸다. 큰 배움이다. 그렇지만 나는 프로젝트 기간 동안 미칠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차별 수업이 끝날 때면 아이들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동안 팽배했던 긴장감을 풀어내야 했다.

상처입은 사람의 마음을 가르치기 위해 상처를 입히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옮긴이의 글에는 이러한 고민이 잘 묻어나 있다. 글 중 양태호주1 씨의 말을 재인용해본다.
차별을 없애 나가고자 하는 과정에서는 왜 차별을 하면 안 되는가라는 보펴적 원리가 도출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것이 양날의 칼이 되어 자신은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지가 문제가 되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에 대해 묻는 것은 굉장한 긴장을 동반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옮긴이가 속한 NGO인 세이브더칠드런에서는주2 차별실험보다 안전한 방법으로 연극이라는 틀을 마련해서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차별을 겪어보는 <알면 알수록 가까워지는 우리>라는 수업을 마련했다. 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연극을 짜고 실행하면서 보인 말과 동작, 생각들은 전문 어린이 극단에 의해 '엄마가 모르는 친구'라는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당시 연극수업에 참여했던 아이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주3. 되돌이켜보면 아이들은 이상할 만큼 적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인터뷰에 시큰둥한 사람은 아이들을 하교시켜야 하는 담임 선생님뿐이었을 정도였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연극수업을 포함하는 차별방지 캠페인 <다양한국>을 소개한 세이브더칠드런 소식지를 추천한다주4.

다만 이 연극수업에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연극이라는 틀이 주는 안전거리 때문일지는 몰라도 '나도 가해자'라는 인식까지 다가서지 못한 아이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다양한국> 캠페인이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지만, 그게 과연 한 NGO의 일이기만 할까?

이주노동자는 어쩐지 꺼림칙하다고 느끼는 사람, 내 아이가 혹은 내 동생이 자신보다 '나은' 친구들과만 어울리길 내심으로라도 바라본 적 있는 사람, 자신도 모르게 매력적인 사람에게 더 관대해지는 사람, 그런 상황을 방관하는 사람,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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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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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
  1.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창별에 맞서 싸웠던 활동가. 아래 글은 <다문화교육과 공생의 실현>이라는 책에 나와있다 한다 [Back]
  2. 이렇게 쓰면 필자가 마치 제3의 입장 같아 보이지만 실토하자면 지금 필자는 옮긴이의 부하 직원이다 [Back]
  3. 옮긴이의 글에 나온 아이들의 말을 받아 적은 사람이 바로 필자다 [Back]
  4. 어쩌다보니 홍보성 글이 되어 가는 것 같지만 옮긴이가 이 책을 옮기게 된 계기 자체도 이 캠페인 때문이었으니 배경지식으로 둘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Back]
2012/12/26 13:40 2012/12/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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