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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13 번역의 탄생: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21)
번역의 탄생

(이희재, 교양인, 2009)

읽는 내내 책이 '나 정도면 소장해도 되지 않니?' 하며 유혹을 날렸다. 필자는 인상적인 구절을 볼 때면 책에 인덱스 테잎을 붙여 놓는 습관이 있는데, 자제한다고 했건만 스무 개가 넘는 인덱스 테잎이 알록달록 붙어있다. 집어 들 때만해도 '어라, 이 책 꽤 두꺼운 게, 읽는 데 시간 좀 걸리겠어?' 싶었는데, 책장이 휙휙 넘어간다(영어 지문은 굵은 글씨만 읽고 넘겨도 된다). "그래, 이런 표현들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하면서 무릎을 쳐가면서 보는 맛이란!


앨저넌에게 꽃을

작품에 몰입할 수 없게 했던 번역투

딱딱한 직역, 그 불쾌한 만남

<앨저넌에게 꽃을 Flowers for Algernon>이란 작품을 보기까지 기대가 참 많았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을 매우 즐겁게 봤고, 책을 검색했을 때도 찬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작품에 좀처럼 집중이 안 된다. 대놓고 하는 직역'투'주1. 아예 원문이 어떤 글이었을 지 보일 듯한 그 문장들이 눈에 거슬렸다. 매끄럽지 않고 자꾸 오돌토돌했다. 80년대 이전에 나온 책들이 쓰는 '-읍니다' 어미 만큼이나 나를 자꾸 작품 밖으로 밀어냈다.

그래도 꾸역꾸역 읽긴했지만, 번역 때문에 아쉬움이 참 많았던 작품이었다. '번역만 매끄러웠으면...'하는 아쉬움이 아예 '차라리 내가 번역하고 말겠다'는 교만까지 이렀으니 읽는 분들도 대충 짐작하실 거다.

저자는 이런 상투적이고 딱딱한 직역에 일침을 가한다. 참, 조심하시라. 여기서 말하는 직역은 번역투를 그대로 남긴, 그저 단어들을 사전에 기대어 1:1로 바꾸고 순서만 다시 맞춘 기계식번역을 이야기한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린다는 의미의 직역은 저자 역시 그 가치를 인정한다.

가장 대표적인 번역투라면 수동태를 들 수 있다. 우리 말은 능동태를 좋아한다. 그런데도 '죽임을 당했다', '녹력이 기울여졌다', '생산된다', '발견되었다' 등등 어색한 표현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번역투의 범람이다.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다'라는 표현도 그렇다. 제발, 적어도 문학작품에서만은 이런 표현들로 손이 오그라지는 일이 없었으면좋겠다.



옥스퍼드 사전

내 과제 도우미, 옥스퍼드 사전

영어 단어보다 우리 말이 더 어려워! - 영한 사전

필자는 중3 때부터 영영 사전을 쓰고, 의도적으로 영한 사전을 피했다. 있어보이는 척이 해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쓸데없는 풀이 과정이 힘들었다. 중학생이 배우는 말이래봐야 별 어려운 문장이 아니다. 그런데 영한 사전을 쓰면 영문-> 어려운 우리 말 -> 쉬운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그런 경험들 없나? 영어 단어를 몰라서 영한 사전을 찾으니 우리말도 도통 모르는 단어인 적?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한 사전에서 쓰는 말을 문장에 바로 집어 넣으면 어색해서 뜻이 통하는 다른 말로 바꿔줘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The bad weather is causing problems for many farmers.
라는 문장이 있다 치자.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의 원인이 되다', '야기하다'라고 나온다.
평범한 문장이 갑자기 '나쁜 날씨가 많은 농부들에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라는 어려운 문장이 된다. 저 문장이 하려던 말은 '날씨가 나빠서 농부들이 고생이 많다' 쯤인데 말이다. cause를 '-일으킨다' 정도로만 해도 한결 쉬운 문장이 될텐데, '야기하다'라니! 토론이나 방송에나 쓸 법한 단어들로 영어를 접해야 하는 중고생들이 영어를 어려워할 만하다.

영한 사전이 이렇게 어려워진 건 영한 사전이 사실 영-일-한 사전이었기 때문이다. 영일 사전을 가져다 번역해서 만든 게 지금 우리 보는 영한 사전이다. 일본에서는 평이한 수준으로 쓰는 한자어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한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 탓이다. 게다가 뜻이 달라지기까지 한다. humanism을 한영사전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학이 아니라 인도주의(humanitarianism)으로 설명한다. 서양문화사 공부하는 학생이 humanism을 찾아봤는 데 이런 설명이 나온다 생각해보라!



아로새긴 글자

engrave: '각인하다' vs '아로새기다'

결국은 풍부한 어휘가 힘

그렇다. 결국은 풍부한 어휘를 적재적소에 얼마나 잘 쓰느냐의 문제다. 물론 이 풍부하다는 게 '어려운 단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다. 나의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던 저자의 번역을 소개하겠다.

(pp.194) 한낮에 스페인 어느 지방 소도시에서 주민들이 공원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고 칩시다.
It is one o'clock, the hottest time of day. The entire population is resting in the shade of the big trees in the park.

만약 이 영문을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었다."라고 하면 한국 독자는 시골의 마을 어귀에 있는 커다란 정자나무 한 그루를 연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오해를 피하고 싶을 때는 '들'을 넣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들'을 집어넣지 않으면서도 복수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중략) "오후 1시, 가장 뜨거울 때다. 주민 모두가 공원의 큼직큼직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다."

필자는 '우아~'하고 소리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무'들'이라는 군더더기 없이 작가의 의도를 잘 소화하면서 우리말의 묘미까지 살렸다. 정말 우리 말에 대한 애정과 이해, 많은 경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저자는 <광장>의 작가 최인훈을 존경한단다. 최인훈은 적어도 문학어로서 한국어는 일본어에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결국 그 믿음이 토박이말의 표현 가능성을 최대한 넓히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고 보기 때문이다(pp.294).

비슷한 이유로 나는 가수 이적의 가사를 참 사랑한다주2. 영어를 빌리지 않아도 그가 쓴 가사들은 참 아름답다주3. '마른 하늘을 달려 나 그대에게 안길수만 있으면'(이적, 하늘을 달리다), '기다림은 방 한 구석 잊혀진 화초처럼 조금씩 시들어 고개 숙여가고'(이적, Rain), '나의 마음 빈 곳에 너의 이름을 아로새기네'(이적, Rain), '불어오는 바람 어쩌지도 못한채 난 그저 멍할 뿐이었지'(패닉, 정류장), '언제고 떨쳐 낼 수 없는 꿈이라면 쏟아지는 폭풍을 거슬러 달리자'(패닉, 로시난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이적, 다행이다).

번역가이든, 작가이든간에 앞으로는 저자만큼 우리 말에 능하고 애정이 많은 사람이 늘었으면 좋겠다. 번역가/작가 지망생이여, 이 책은 부디 꼭! 읽어주시길. 꼭, 꼭,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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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쓰면 배가 아픈 속 좁은 글쟁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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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
  1. 영어 참고서에서 나오는 공식을 그대로 가져다 쓴 흔적. 예) '네가 ○○했더라면~, ○○은/는 ~ 하지 않았을 텐데' [Back]
  2. 물론 그의 목소리, 달변, 웃음소리, 해박한 지식, 그만의 세계까지 모두모두 사랑한다+ㅁ+ 보고계시나요, 적군? [Back]
  3. 그의 2집에 실린 <하늘을 달리다>는 KBS '바른 언어상 노랫말' 부문 수상작이다 [Back]
2010/01/13 00:31 2010/01/1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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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ativebox 2010/01/13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서취향테스트를 통해서 들어왔는데, 역시나! 번역의 탄생이 맨 위에 올라와 있어서 깜딱! 놀랐어요. -.-;; 역시나 취향에 대한 변별력이 있나보네요. 반갑습니다.

  2. nativebox 2010/01/13 17: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 아직 못읽고 책장에 꽂혀있어요. 숙성시키는 중. 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