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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3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발칙한 독서 이야기 (14)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2009)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본 한 인터넷 서점 MD의 블로그 글 때문이었다. 인문학 MD로 기억하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는 고백성 글이었다. 그러면서 언급한 책이었다.

참 매력적이고 발칙한 제목 아닌가? 우리가 흔히 '아는 척'으로 치부하여 쉬쉬하는 내용을 책으로 내다니! 저자는 에필로그에는 아예 대놓고 강의 하는 입장에서 읽어본 적 없는 책을 언급한다고 써놓았다. 이 책에서조차 자신이 언급하는 책들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읽다보면 저자가 허영덩어리도 아니고, 무식하기는 커녕 책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해 본 지식인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비(非)독서는 독서의 부재인가?

검정-흰색

독서/비독서는 회색과도 같다

그가 가장 먼저 제기하는 문제는 비독서에 관한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읽은 책이라 함은 물리적 책에 쓰인 글자를 읽은 경험이 있는 책을 이야기한다. 읽지 않은 책은 읽은 책을 제외한 책이다. 이런 정의가 옳은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달과 6펜스>를 읽었다. 그러나 독해가 힘들었고, 따라서 지금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 지, 어떤 상황에서 나온 책인지도 알지 못한다.
반대로 필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원전으로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다윈이 그 책에 주장한 이론을 여러 해에 걸쳐 배워서 알고 있다. 그가 <종의 기원>을 쓰기 전에 나온 멜서스의 <인구론>과 'Survival of the fittest' 등의 개념등에도 익숙하다. <종의 기원>을 쓰기 전 그가 다녀온 갈라파고스 여행에 대해서도 들어보았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이후 생물학과 사회전반에 끼친 영향에도 어느 정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자, 내가 '읽은' 책은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종이 위의 글자를 읽은 적 있는 <달과 6펜스>인가, 아니면 물리적 실체를 대한 적 없는 <종의 기원>인가? 저자라면 <종의 기원>에 손을 들어줄 거라 의심치 않는다. 독서의 부재가 비독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에 따른 망각이란 축을 고려하면 더욱 독서/비독서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분명 독해도 가능했고, 어떤 감동을 받은 책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잊는다. 나같은 경우,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생기면 인덱스테잎으로 표시해놓은 후, 나중에 노트 한 권에 옮겨적는다. 테잎으로 표시해두는 수고, 손으로 손수 옮겨 적는 수고까지 함에도 불구코, 그 노트를 훑을 때마다 놀란다. 내가 이런 글을 읽었던가? 아, 이런 것도 있었지, 맞다. 이런 경우에는 그 책을 읽었다 해야하나, 읽지 않았다 해야하나? 독서/비독서는 여부로만 판단할 수 없는 스펙트럼이다.



읽지 않고 '읽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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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 '읽은' 책으로 위에서 <종의 기원>으로 대충 이야기 했으니 감들 잡았으리라 믿는다. 이를 이용해 다른 사람과 할 수 있는 게임을 저자는 제시하기도 한다주1. 그 게임의 이름은 모욕게임이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읽지 않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책을 한 권 생각해야 하며 누군가가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때마다 1점을 얻는 것이다"주2 그러니까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다들 읽는다고 여기는 책이지만 나는 읽은 적 없는 책을 골라야 한다. <무대전환>에서 영문학 교수는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이 이제껏 <햄릿>을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이 소설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좋은 예로 꼽힌다.

당신이라면 어떤 책을 꼽겠는가?
<데미안>, <오만과 편견>, <열하일기>, <난중일기>, <백범일지>, <톰소여의 모험> 등이 머리를 스치고 갔다주3. 그러나 역시 이 책이 내게 적격이리라. <삼국지>.



책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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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속에 어떻게 위치하는가가 관건!

필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 말았다. 이렇게 밝혀다 할지라도 나는 <파우스트>에 대해 여전히 이야기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괴테 이전에도 있던 이야기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로 알려지게 된 결말의 전환과 그 의미를 '돌아온 탕아' 이야기와 버무려 이야기 할 수 있다. 혹은 종교개혁과 연관지어 루터가 제기한 'Justification only by faith'주4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혹은 말러주5의 교향곡 2번 '부활 Resurrection'을 언급하면서 이후 예술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나면 <파우스트>를 털어내고 언급한 주제로 이야기 중심을 옮겨갈 수 있다.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용"이 절대 요소가 아니란 거다. 그보다 주요한 요소로 저자가 꼽는 것은 담론이다. 그 책이 제기하는 것이 '담론 속에 어떻게 위치하는가'를 파악한다면 그 책을 펴보지 않고도 책을 언급할 수 있고, 이는 금기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이로하여 다른 사람들이-그들이 그 책을 읽었든 아니든- 그 책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다만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 그물망"이 미리 촘촘해야 가능하다. 그 책의 제목 혹은 저자, 혹은 단편된 이야기만 듣고도 그 책을 건져올려야 하는데 몇 오라기 없는 그물로는 무리니까. 이 말이 역설적으로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고 주장한다고 한숨쉴 필요는 없다. 위에도 썼지만 읽는 것만이 '읽는' 것은 아니니까. 귀동냥으로 듣는 책 이야기, 혹은 도서관 서가를 거닐며 하는 책등 구경, 영화같이 다른 형태의 파악 역시 '읽는' 것이며 지식 그물망의 실오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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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물고 곁가지를 쳐보자

다만 그렇게 얻은 지식들이 얽혀있어야 하지, 낱오라기 형태로는 그물이 될 수 없다. 여기서 필자의 추천 하나 들어가자. 혼자놀기 만렙을 바라보는 필자가 하는 것인데, 멍때리는 시간에 하기 좋다. 마인드맵과 비슷하지만 특정 중심개념 없이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곁가지를 치면 된다. 새로 쓴 개념이 저 멀리 써 놓은 것과도 연관된다면 과감히 줄로 이어도 된다. 왼쪽은 어느 공강시간에 했던 흔적이다. 말러로 시작하여 장근석, 갈라[주석]살바도르 달리의 아내. 달리의 많은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주석]까지 나왔다. 이렇게 실없이 죽죽 써나가다 보면, 내가 알고있던 지식들 사이에서 이전에 발견치 못했던 '관계'들이 보인다. 그물이 엮어지는 거다. 자, 낚시질 준비 되었는가?



내면의 책, 당신이 읽은 책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사람의 기억은 컴퓨터의 데이터 저장과 다르다. 많은 부분을 망각하고, 어떤 부분은 재조직한다. 이 때 자신의 처지나 신념,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내면의 책'은 각기 다르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의 물리적 책과 내 '내면의 책'은 사뭇 다르다. 대부분의 페이지는 흐릿하고 얇아졌다. 그러나 동생만은 가난 때문에 몸을 팔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 때문에 매춘을 하는 18살 어린 소녀의 사연은 여전히 진하고, 다른 텍스트들보다 백만배 큰 글씨로 씌여있다. 그 책을 읽을 당시 필자는 비슷한 나이(20살)이었고, 같은 여자며, 늘 언니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품고사는 동생이기 때문일거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책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내면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책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그 책의 '내면의 책'이 있다. 이 '내면의 책'은 때론 너무 달라서 같은 책을 이야기 하는 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럴 수록 자신의 '내면의 책'을 환기시켜주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은 '내면의 책'이 속해 있는 지식 그물망을 더 확장시켜줄 수 있다. 당신의 '내면의 책'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렇지만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책 얘기를 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함부로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다."주6
저자는 우리에게 책은(혹은 책을 통한 교양은) 너무 신성화 되어있다 주장한다. 프롤로그를 읽을 때만해도 "어떻게 대학 교수가!"라며 의아해하던 나조차도 이 책을 읽고나니 끄덕이게 된다.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자유롭게 책을 읽을 테고 더 많이 읽을 지도 모를텐데.



부재에 대한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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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주 리뷰가 없어서 서운해하며 발길 돌린 지인들&구독자들이 계실 지 모르겠다. 이사하고, 친구 만나고, 선생님 뵙고 하느라 바빠서 책을 덜 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혀 책을 읽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리뷰 올리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여겼다. 리뷰를 쓰려니 불특정 대다수에게 공개되는 블로그에 밝히고 싶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를 뺄 수 없어서(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이기도 했고, 책의 타겟 독자가 너무 한정적인 준전문서적(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이기도 했다.

물론 한 달에 6권 읽기를 포기한 적도 없고, 도달 못할 상황도 아니지만, 블로그 발행을 하는 입장에서 평균치보다 오랫동안 새 글을 올리지 않은 점은 송구스럽다.

부디 노하지 마시고 계속 블로그 예뻐해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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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아닌우현.

책은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매체인 동시에 삶에서 가장 쉬운 도피처라고 믿는 사람.
다른 사람이 글을 너무 잘 쓰면 배가 아픈 속 좁은 글쟁이 워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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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
  1. 그가 훑어 본 책 <무대전환>을 인용해서! [Back]
  2. 본문 164쪽. <무대전환>에서 재인용 [Back]
  3. 그렇다, 다 나는 읽은 적 없는 책이다 [Back]
  4. 영어강의의 부작용을 보고 계시는 바입니다. 우리말로 뭐라 옮겨야 하는 지 알수가 없군요. 영어강의 3년만에 자국어사고능력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Back]
  5. 구스타브 말러.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뮤지션 중 한 명이다. 내년이면 서거 100주년이니 공연이 많을 거다 [Back]
  6. 본문 162쪽 [Back]
2010/02/03 13:24 2010/02/0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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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로그컴퍼니 2010/03/10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희경 작가님의 감성수작 <거짓말 1,2> 대본집 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난 해 많은 사랑을 받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이은 노희경 작가의 두번째 대본집이예요. 한국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 폐인 드라마 <거짓말>의 읽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